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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같이 일구고 싶은 공동육아
작성자 :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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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6-12 17:06:32 (7년이상전),  조회 : 900


2007년 12월. 공동육아 협동조합 어린이집의 조합원이 되어 서당개 삼년의 세월이 흘렀다. 올 3월에 총회 및 신임이사진 교육에서 전환기의 공동육아에 대한 얘기가 있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수효가 늘어나는 추이를 그린 그래프가 처음으로 멈춘 해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공동육아 앞날을 생각하는 모임2에서는 그간 공동육아의 성과에 대한 논의가 많았으므로 한계에 대해 짚어보는 시간도 있었다. 정체된 시기 스스로의 정체성을 돌아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요즘은 일반 어린이집에서도 친환경 먹을거리를 먹이고, 나들이도 다니고, 날적이도 쓴다고 한다. 공동육아의 바람직한 보육형태가 일반 보육시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했고 그것을 이룬 것이다. 일반 어린이집의 유사 공동육아화에 껍질을 복제해 주었다면 그와는 차별화된 진정한 공동육아만의 세계는 무엇일까. 공동육아만이 가지는 고유 알갱이는 무엇일까 하는 치열한 고민을 해야 하는 시점인 것 같다.
이 시기 우리 모두 공동육아는 원래 공동육아 운동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으면 싶다. 이기적인 한계를 넘어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 성장이나 확산은 차치하고라도 그럴 때에만 공동육아 생명연장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인 설립 11주년 기념 100분 토론회의 주제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다.’라는 것이었다. 아이만 잘 키우면 그 아이가 자라나 이 사회를 좋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에 국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 보육을 매개로 한 공동체에서 아이는 물론 부모와 교사도 성장하는 것이며 밖으로 눈을 돌려 지역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공동육아 운동을 하기 위한 틀거리로 모색한 것이 협동조합이고 어린이집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집에 방점을 찍어 부모조합원이건 교사조합원이건 아이 하나 잘 키우기 위해 왔다는 생각에 다른 많은 것엔 무관심해도 된다고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공동육아에서 공동으로 키우는 아이란 것은 우리 터전에 오는 아이들까지를 아우르는, 내 아이에서 조금 확장된 의미의 우리 아이인 것 같다.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된 것처럼 다른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이고 우리 터전에 왔을 때야 비로소 의미 있는 아이들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전철을 탔을 때 빈자리에 얼른 앉으며 없는 자리까지 친구에게 권해서 그가 앉는 대신 다른 사람이 일어서게 되는 상황을 연출하는 확장된 이기심을 떠올리는 건 너무 무례한 일일까.
조합에 역점을 두어 출자, 설립, 운영에 목을 매다보니 늘 개별조합의 안정화와 운영 뒷전으로 사회적 과제들이 밀려난다. 더불어 사는 삶을 아이들이 자연스레 익힐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왔다는 조합원의 답변을 듣는다. 헌데 내가 나누고 베풀지 않으며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층통합은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인지. n분의 1이라는 절대명제에 돈도 활동도 딱 그만큼 해낼 수 없는 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머지 사람들의 부담이고 짐이다, 하여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참으로 당당하다.

몰랐는데, 이번 ‘공동육아 부모의 보육 실태조사 및 만족도 조사’에서 공동육아 사람들 어느 정도 살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물론 빚을 내어 출자금을 내며 들어오기도 한다. 돈이 있거나 아니면 이렇게 비빌 언덕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올 수 있는 곳이 현재의 공동육아다. 학력들도 좋아 미래는 한시적으로 어려운 지금보다 황금빛일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도 쭈욱- 잘 살고 잘 난 사람들만 올 수 있는 공동육아는 아니었음 좋겠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
영구터전을 만든 곳에서 공적기금을 적립해서 빚을 없애면 부동산 구매나 임대차보증금 명목의 출자금이란 것을 없앨 수 있겠다. 이렇게 소중하게 얻어지는 공간에서 공동육아의 공공성을 확보하면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득에 따른 차등보육료를 실행하고 교사처우개선비, 장애아통합, 저소득층통합을 위한 기금을 적립해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도 몇 몇 어린이집에서 이미 이루어낸 일이다.
요는 들고 들어온 돈 놓고 나가면 되는 일이다. 그럼 다시 들고 들어오는 일의 반복을 끊을 수 있다. 전세를 전전하지 않고 터전을 구매하고 구매한 터전의 빚을 털어버릴 수 있는 것도 내 아이는 나가지만 우리 사회의 아이들을 위한 기부에서 가능하다. 전환기 공동육아의 아름다운 결단. 혼자만의 상상이요 꿈일까? 주변 어린이집에서 영구터전 마련을 위해 전 조합원이 출자금 전액을 놓고 나가기로 했다고 결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유독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조합원들의 집합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그 마음과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내가 살고 있는 성미산마을공동체의 주춧돌은 공동육아였다고 한다. 공동체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터전에서 익힌 직접민주주의의 기량이 밑바탕이 되었다 한다.
공동육아가 전국 60여개 어린이집으로 가파른 양적 성장을 거쳐 오며 언제부터인가 초기의 부모조합원들이나 교사들의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젠 보육운동에 대한 관심이나 공동체에 대한 기대로 찾지 않고 개별 욕구와 이해를 기반으로 오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해야 할까, 변화된 상황에 맞추어 가는 것이 살아있는 운동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래도 전자의 주장을 하고 싶다. 일반 어린이집과 차이가 적어지고 없어진다면 하여 아마활동이라는 버거운 역할만이 부각된다면 시장성 또한 떨어질 것이고 늘 충원문제에 골몰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조합원 입맛에 맞는 변신을 하며 계층에도 장애아에도 마을에도 문 닫아건다면 한 조합 25가구 남짓 가진 자들의 공동육아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걸까. 부족하더라도 채워주고 이끌어주며 같이 가자는 다독임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높은 진입장벽 안에서 폐쇄된 ‘우리’일 수밖에 없다. 혹은 돈과 여건 되는 누구나에게 열려있되 그 누구나가 들어와 성장할 수 있는 틀거리와 알맹이가 없다면 공동육아형 어린이집일 뿐이다. 다양한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들어와 한순간 머물며 유기농 먹을거리든 나들이든 낮은 교사 대 아동비율이든 원하는 것을 취하고 제각기 색깔에 맞는 삶을 찾아 떠난다면 그 다양성은 무지개 빛 조화라기보다 잡탕에 가깝다. 일반 어린이집 부모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으면서 선생님들에게만 공동육아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희생의 강요로 역시 무의미하다.
조합과 어린이집이라는 틀거리가 공동육아 운동을 담아내기에 적합하지 않다면 차라리 그것을 바꾸자.
 

* 글쓴이 : 김우 (2007년 조합대표자회의 부의장)

* 출처 : 공동육아회보 200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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