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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달릴수록 넓어지는 길, 달리며 뒹굴수록 힘이 나는 길
작성자 :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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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6-12 16:56:38 (7년이상전),  수정 : 2009-06-12 16:58:24 (7년이상전),  조회 : 94

공동육아, 물음표에 서다

 
공동육아 앞날을 생각하는 모임 두 번째가 끝나고 많은 얘기를 들었다. 공동육아에 대해 들은 얘기 중에서 가장 속 시원했다는 말부터 교사들을 몰아붙였다, 조합이라도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안 그래도 힘든 때 조합마저 흔들면 공동육아 망한다는 얘기,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조합을 다시 생각해볼 때이다라는 말까지 공동육아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고민의 지점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들이었다. 우리가 공동육아의 현재를 위기라고 표현하든 전환기라고 표현하든 혹은 기회라고 표현하든 공동육아가 어떤 의미 있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글은 공동육아 앞날을 생각하는 두 번째 모임에서 발제한 내용을 중심으로 2008년에 공동육아 미래위원회를 제안하기 위한 글이다.
 
공동육아 앞날을 생각하는 첫 번째 모임은 2005년 겨울이었다. 이후 2년여 동안 공동육아에 대한 많은 물음과 답들이 오갔다. 이러한 우리들의 논의는 그동안 공동육아 회보를 통해서 공유해왔다. 2007년 겨울,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하고 공동육아의 앞날을 위한 구체적인 과제를 내오기 위하여 두 번째 공동육아 앞날을 생각하는 모임을 갖게 되었다. 사실 공동육아에서 공동육아의 현실과 전망을 놓고 문제제기를 하기란 참 어렵다. 공동육아 각 현장이 처해있는 상황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이 현장에서는 절실한 얘기가 저 현장에서는 배 부른 얘기가 될 수도 있다. 공동육아 현장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것도 힘든데 사회적 공공성 운운하는 것은 허망하고 당위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공동육아는 언제나 위기인 듯 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대로 두어도 잘 걸어갈 것 같기도 하다.
 
이제 다가오는 2008년은 해송이 30년이 되는 해이다. 해송을 만들 당시의 사회는 계급적 차이가 극명하던 상황이었다. 굴욕적인 삶의 재생산이 뻔하게 보이는 상황이었다. 권력이 교육을 통해서 작동하고, 이러한 권력의 작동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아’하면 ‘어’하는, 한마디면 알아듣는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 상황을 보며, 처음 해송을 만들었던 사람들은 자선은 위선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선이 아닌 힘의 충전, 그런 계기를 찾고자 하는 것이 당시의 고민이었고 그것이 바로 공동육아의 출발 정신이다. 보육은 민주화투쟁의 한 줄기이면서 작은 힘으로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실천이었다. 공동육아가 주목한 대상은 국가 권력이 공공연하게 장악하고 있는 초등을 우회한 더 아래의 연령이었다. 영유아기에 공동체 경험을 하며 성장하면 초등 과정부터 국가권력이 개입한다 해도 정체성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동육아운동은 멀리는 해송아기둥지가 출발부터 30여년을, 가깝게는 신촌 우리어린이집이 출발부터 10여년을 달려왔다. 그동안 공동육아가 주목한 것은 우리 사회 아이들의 성장과 그 성장을 함께 하는 어른, 사회, 국가의 역할과 책임이었다. 아이들이 살아나야 사회와 시대의 건강성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공동육아의 믿음이었다. “함께 크는 아이들, 더불어 성장하는 어른들”이라는 공동육아의 구호는 이러한 지향을 담고 있다. 공동육아운동은 그동안 자발적인 열정으로 공동육아운동의 참여자들에게는 자부심과 ‘사람 사는 맛’을, 사회적으로는 ‘건강한 육아’의 모델을 보여주며, 빠르게 안착하여왔다.
 
지금 한편에서는 공동육아가 이만큼 커졌으니 보다 더 공공성을 갖추어야한다는 요구가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육아라도 잘하자는 것이 공동육아를 살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공동육아는 육아를 하기위해 모인 것이 맞다. 다만 육아를 충실하게 하는 것 자체가 사회에 대한 발언이 되어야하는데, 육아와 공공성이 따로 노는 것에 있다. 원래 그 둘은 다르지 않았다. 잘 된 육아 자체가 사회적 발언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아이를 잘 키우면 그것으로 사회적 발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바로 공동체성과 공공성에 있기 때문이다.
 
공동육아, 신발끈을 묶다
 
지금 공동육아는 공동육아에 좋은 것이면 모두 우리 사회에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이유는 아니다. 지금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공동육아 안으로는 더 안전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공동육아가 우리 사회에 있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공동육아, 다시 신발끈을 묶자.
 
공동육아운동과 제도화는 현재 공동육아가 대응해야할 가장 현실적인 과제이다. 이는 공동육아가 지닌 자율성과 자치의 역동성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시킬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에 대한 과제이기도 하고, 공동육아의 보육기관화를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공동육아는 제도화에 대한 뼈아픈 경험이 있다. 해송유아원이 새마을 유아원으로 제도화되는 과정은 운동과 현장의 자율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제도화는 결국 국가권력에로의 흡수임을 알게 해주었다. 때문에 부모협동보육시설로 법제화한 것은 공동육아의 강력한 운동성을 바탕으로 성취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 현실적으로 공동육아가 제도화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것에는 재정적인 측면에 공적 자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면, 공동육아의 진입장벽은 보다 낮아질 것이라는 점이 적극적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재정의 자율성은 그동안 국가권력이나 시장권력에 맞서 공동육아의 정체성을 지켜낸 중요한 기반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제도화 국면에서 재정의 자율성이 아닌 다른 동력으로 공동육아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이 중요하다.
 
공동육아 주체, 법인, 교사, 부모 등 공동육아 구성원들의 자리 찾기에 대한 과제 역시 공동육아의 전망과 직결되어 있다. 사실 공동육아운동에서 가장 큰 화두는 어떻게 주인을 만들 것인가에 있다. 민주적인 운영을 통해 주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우리의 기대이지만, 오히려 출자금을 중심으로 주인의식이 분명해지는 것 같다. 돈을 내야 주인이 되는 부모, 돈 낸 만큼 찾아가겠다는 부모들로는 공동육아의 주인 만들기는 배타적이고 협소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출자금이 없으면, 조합이 없으면 주인의식이 생기지 않는 것인가? 참여자의 주체성을 보장하는 공동육아의 새로운 현장모델은 무엇인가?
 
공동육아의 역사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 중의 하나는 교사이다. 공동육아를 자신의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3백명을 훌쩍 넘어선 것이다. 이제 공동육아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공동육아 교사가 지위와 권위를 확보하기위해서는 우리가 출자금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공동육아운동은 부모교사공동체를 통해 실천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초기에는 부모는 출자금으로, 교사는 교육으로 출자를 하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교사조합원제도 역시 제안과 논의가 있었으나 활발하게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제는 공동육아의 실제 주인으로서의 교사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방안들이 검토되고 제안되기를 기대한다.
 
조합은 참여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형태이고, 일상적인 공동체 경험이 가능하다. 공동육아가 조합이라는 조직형태를 선택한 것은 주인의식과 공동체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실제로 공동육아가 아이들의 성장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성장을 가장 중요한 수확으로 꼽을 수 있는 것에는 조합이 큰 역할을 하였다. 공동육아 역사에서 공동육아의 가치나 철학도 중요하였지만 그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조합이라는 형태도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만들지 않고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조직으로서 최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공동육아의 앞날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이야기되는 것이 조합이다. 조합은 현재 조합원들의 소유라기보다는 초기 설립하였던 조합원들부터 현재 조합원들까지 공동의 소유라고 보아야하지만 졸업하면 공동육아와의 관계 맺기가 힘들다. 우리 조합 밖의 일에는 관심도 없고 여력도 없다는 배타성이나 폐쇄성도 나타난다. 공동육아운동을 실현하기위한 조직형태로서 조합이 갖는 가장 큰 힘은 주인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주인의식이 출자금에 집중하여 나타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현재 조합이 공동육아운동 현장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차원의 노력과 실천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조합형 어린이집의 자기진화는 점점 쉽지 않은 과정이 될 것이다.
 
공동육아, 다시 달리다
 
공동육아의 병목현상은 국가권력이 교육을 통해 작동하던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시장 권력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삶을 억압하는 사회 환경과 조합이라는 틀이 갑옷화하고 있는 현상, 공동육아의 세대교체와 개인문화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아동은 어른을 위한 준비기가 아니며, 아동의 양육과 성장을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한다는 문제제기 자체가 진보적인 논의이던 시기를 지났다. 이는 공동육아의 실천이 큰 역할을 한 소중한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공동육아가 그동안 제기하였던 ‘진보적’인 제안들을 사회문화적인 변화에 어떻게 능동적으로 대응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만 한다. 즉 공동육아의 가치관을 사회적으로 발현하는 우리의 행위양식에 대하여 고민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똑같이 하면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동육아도 힘든 시기이니, 성과를 바탕으로 더욱 안으로 안으로 단결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과감히 공동육아의 한계를 돌파하며 변화를 꾀하는 것이다. 공동육아 앞날을 생각하는 모임 이후 여러 시도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겨울교사대회에서는 교사들이 공동육아에서의 교사의 책임과 역할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할 것이다. 내년에 이루어질 대전에서의 새로운 어린이집 모델사업은 공동육아의 진입 문턱을 낮추는 시범사업이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국공립 위탁이나 국공립시설로의 전환 등도 모색해볼만하다. 이러한 논의와 실천적인 노력들은 모두 자기중심이 있는, 그러나 변화에 대응하는 공동육아를 위한 노력들이 될 것이다.
 
조직재구성이후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공동육아의 전체사업목표는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의 철학과 제도의 틀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다음 시기인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사회와 함께하는 공동육아가 3개년 전체 목표였다. 이제 2008년에는 다시 3개년 계획을 수립하여야한다. 그러나 현재 공동육아가 맞고 있는 대외적, 대내적 도전들을 보면, 2008년부터 이어지는 3개년 계획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장기적인 전망과 실천과제들이 더욱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동육아 미래위원회를 제안한다. 공동육아 미래위원회는 3개년 전체 계획을 기반으로 공동육아 향후 10년의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될 것이다.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정도 부모, 교사, 활동가들이 모두 모여 집중적으로 공동육아 10년 전망을 내오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나아가 1978년부터 2007년까지 이르는 공동육아의 한세대가 마무리되고 있으므로 공동육아의 다음 세대 2008년~2037년까지의 30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결국 공동육아의 희망은 사람이다. 다시 사람들이 모여 공동육아의 미래를 그리자. 그리고 행동하자.
 
 글쓴이 :  황윤옥 
 
  출처 : 공동육아회보 2007년 겨울호 [특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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