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일 푸른 물이 들 것 같이 화창한 날, 우리는 8시20분까지 소풍터미널에 모였다.
역사기행의 마지막 국내 탐방 장소인 신채호 선생님의 묘소와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학기에 했던 안중근 의사와 윤동주 시인의 국내 탐방 장소는 모두 서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가야할 곳은 청주이다. 신채호 선생님의 생가는 대전이지만, 문중이 있던 청주시 귀래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16세 성균관에 입학하여 독립 운동에 힘을 쏟으시다가 언론사와 신민회 활동 등으로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서울과 고향을 왕래하며 생활하셨다. 그리고 뤼순감옥에서 57세에 영면하실 때까지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하셨다. 심지어 국적도 아들과 며느리의 노력으로 2009년이 되어서야 회복되셨다.
시외버스를 타고 청주터미널에 내려 다시 버스를 2번 갈아타, 3시간이 넘는 이동 끝에 청주시 귀래리에 도착했다. 점심을 먹고 30여분 코스모스가 살랑살랑 나부끼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 도착한 신채호 선생님의 묘소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셨던 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소박했다. 이 묘소는 1947년 가족들이 임시 가묘를 한 곳에 2007년 다시 정식 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묘 앞에 서 있는 묘비도 1947년 한용운 시인이 만든 것이었는데, 그동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두었다가 묘소를 조성하면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앞에서 묵념을 하고 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도 문을 연지 얼마 되지 않아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진 않았다. 『조선상고사』 등 여러 권의 책과 신문에 글을 썼지만, 가장 눈에 띄는 글은 바로 우리 민족 독립의 이유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담은 ≪조선혁명선언≫ 이었다. 이 글은 김원봉의 부탁으로 신채호 선생님이 쓴 의열단의 선언문이기도 하다.
100년 전 살았던 이름도 모를 수많은 분들의 희생과 노고 덕분에, 나는 평화롭게 2019년 가을을 보내고 있다. 삶이 이어지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이기도 하지만 또한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도움 덕분이기도 하다. 역사 기행을 하며 우리 곁에 있었던, 그리고 지금 함께 있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들을 다시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이제 11월이면 이 분들의 자취를 쫓아 중국으로 기행을 떠난다. 중국에서는 어떤 만남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