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일
간만에 음주를 해서(정말 극소량이었는데!) 평소보다 늦잠을 잤다. 정든 숙소도 이제 마지막이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아침을 먹고 미팅을 했다. 어제 저녁에 느꼈던 것들에 대해 가감없이 얘기했다. 나도 여기 와서 변했나보다. 아니다 싶은 것에 대해 확실하게 얘기하는 것이 조금 쉬워졌다. 그것이 비록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닐지라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라고 확신한 순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날이라 각자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보아하니 2학년 여학생들은 그런 대상이 무척 많다. 반면 1학년 남학생들은 관계맺은 사람들을 만나기는 하는데, 그 대상이 많지도 않고 적극적이지도 않다. 어쨌든 다들 이렇게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는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정말로 잊지 못할 기억이 된 것은 분명한데...모르겠다. 이 경험을 시작으로 그들의 삶이 무언가 바뀔지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데려온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의 삶은 그대들 것일지니!
오전에 뭘 해야 할까 고민하는 친구들을 데리고 마실을 나갔다 왔다. 비빔밥 할 재료 사러 나갔을 때 보고 여긴 애들과 올 곳이 못 되는구나...싶어 포기하려 했는데, 그래도 인도 떠나기 전 현지 모습을 한 번은 경험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들도 내심 가보고 싶었나보다. 무려 다섯명이 따라나섰다.
인근 다운타운인 화이트필드라는 곳까지 약 1km. 걸어갔다. 일단 무질서한 도로 상황과 경적을 울리지 않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듯 미친 듯이 울려대는 경적 소리는 이미 아이들에게 충분히 경고를 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가면서 정말 very very dirty한 도로의 모습. 온갖 쓰레기가 나뒹굴고 보도블럭이 거의 지진난 듯이 뒤틀리고 이가 빠져 있는. 심지어 그 혼돈의 카오스 사이로 소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정말 amazing india 였다.
날이 더웠다. 읍내 카페에 가서 음료 한 잔씩을 먹고, 마트에 갔다. 아이들은 외국 마트가 처음이다보니 온갖 것들이 다 신기한가 보다. 하긴 그럴 법도 한 것이 일단 물가가 미쳤다! 정말 무지무지무지 싸다. 아이스크림 같은 사치품은 좀 비싸긴 한데, 다른 생필품이나 식재료는 정말 싸다. 이곳에서라면 나도 재벌 흉내내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2층에 올라갔더니 각종 공산품을 파는데 아이들 말로는 대부분 짝퉁이란다. 그러고 보니 뭔가 다 조악한 비주얼이다. 어쨌든 그 와중에도 가격은 정말. 정말.
돌아오는 길은 릭샤를 이용했다. 6명이 2대를 나누어 타고 왔는데, 그 좁은 자리에 3명씩 끼어앉아 오는 것이 조금 미안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우린 정말 사치를 부린 거였다. 운전사 빼고 6명을 한 대에 다 싣고 오는 릭샤가 우리 내린 직후 지나갔다. 동춘서커스도 아니고 그 난폭운전을 극복하고 매달려 오는 인간들이 신기했다.
다시 ECC로 들어오니까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아이들도 그것을 아주 강렬히 느꼈나보다. 소음과 먼지와 무질서가 없는 청정지역. “여기는 인도가 아닌 것 같아요!”
점심을 먹고 짐을 쌌다. 기분이 이상했다. 뭐랄까 굉장히 오랫동안 머문 정든 곳을 떠나는 느낌이랄까. 내가 언젠가 산학교를 떠나게 되면 느낄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미리 예행연습하는 듯. 그런 느낌적인 느낌. 오랫동안 보호받으며, 그 품에 안겨 지냈던 고향같은 곳을 떠나는 느낌이랄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곳임이 분명하다.
이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그리고 우리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 준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ECC를 떠났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진짜 인도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길을 가로막고 있는 소, 먼지 풀풀 날리는 길가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 허름한 건물들과 그 뒤로 보이는 텐트촌까지. 스쳐 지나가지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풍경들. 문득 우리가 있었던 ECC가 그리워졌다.
인천공항만큼이나 화려하고 웅장한 벵갈루루 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드디어 짐의 무게를 잰다! 아이들 급 당황했다. 입고 들고 하면서 대략 무게를 맞춰 놓았지만 7kg는 정말 통과하기 어려운 계체량이랄까. 차라리 내 몸이라면 며칠 굶어 살이라도 빼련만. 다행히 약간의 오버 무게는 눈감아 주었다. 이제 드디어 인도를 떠난다. 내 삶에서, 아이들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인도. 정말로 그리울 것 같다.
2018년 가을. ECC. 벵갈루루. 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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