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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펌]자유교육의 빛과 그림자 양희규
작성자 : 달콤
  수정 | 삭제
입력 : 2009-02-10 21:17:39 (7년이상전),  수정 : 2009-02-10 21:18:00 (7년이상전),  조회 : 100
[통권 50호] 자유교육의 빛과 그림자

[기획 | 자유와 교육] 자유교육의 빛과 그림자

양희규 금산 간디학교와 산청 간디마을학교 교장을 맡고 있습니다. 최근 경북 군위에 있던 간디자유학교를 금산으로 옮겨서 생태마을과 학교 만들기를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희동 선생님께
선생님과 저는 같은 또래 아이를 하나 두고 있고, 이번에 선생님의 아들 도현이와 우리 아이 해은이가 함께 간디자유학교를 졸업한 걸 보면 보통 인연이 아닌 듯합니다. 도현이가 간디학교에 다니지 않았더라면, 간디학교의 교육철학이나 저의 자유주의적 입장에 관해 훨씬 자유롭게 이견을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학부모 입장이 되다보니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3년의 세월을 보낸 것은 아닌지요?
저도 이제 나이도 먹고 역경도 겪다보니, 제 교육적 견해가 옳다는 생각보다는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교육에도 정답은 없다는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육에도 여러 가지 길이 있을 것이고 제 견해는 그런 여러 가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거지요. 이런 입장이 되다보니, 좀더 편한 마음으로 제가 하고 있는 교육의 한계나 약점을 보게 되고 늘 보완하고 수정해가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설령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의견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우정이나 의가 상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교육에서도, 아니 교육에서 오히려 ‘다름의 미학’이 가장 빛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감사드리는 것은, 선생님의 편지가 저로 하여금 간디학교의 교육을 간디학교 테두리 밖의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저는 정말 소중한 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 배움은 제 자신을 위해서나 간디학교 모든 식구들을 위해서 엄청난 가치를 나타낼 것입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1997년 간디학교를 열고부터 지금까지 ‘자유’는 그 무엇보다도 최대 관심사이자 최고의 과제였습니다. ‘간디교육은 자유교육인가 아니면 방치교육인가?’ ‘학생들의 고삐 풀린 자유는 정착을 향해 가는 과도기 문화인가 아니면 퇴폐적인 개판 문화인가?’ 자유의 문제(예를 들어 ‘아이들에게 흡연을 허용할 것인가’)를 두고 교사와 학생, 학부모는 늘 문제를 제기하고 토론하고 서로 갈등해왔습니다. 그것은 아마 우리 사회에 지금까지 늘 자유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더욱이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자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기존학교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대안학교는 당연히 공교육과는 달리 ‘자유의 천국’이란 환상을 품게 하였습니다. 학교를 처음 시작했을 때, 학부모나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 또한 이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아이들에게 생활과 학습의 자유를 주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상당히 순진한 낭만주의적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자유로부터의 도피’란 책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유는 습득되어야 할 하나의 능력이고 따라서 자유교육은 자유의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한 아이들에겐 별 소용이 없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런 아이들에겐 오히려 현실도피, 게으름, 비이성적인 반항의 구실과 핑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갖게 되었던 것이죠.
간디학교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사실상 저는 어렴풋이나마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국 토양에서 완전한 자유학교는 가능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고 나름으로는 그것을 현실에 적용한 것입니다. 즉 서머힐 식의 자유학교는 생각으로는 좋다고 할지 모르지만 한국의 학부모와 시민들이 자기 자식에게 그런 교육을 하려고 하면 주저할 것이라는 거지요. 즉 모든 수업참여 여부를 학생이 결정할 수 있는 학교, 여학생들이 발가벗고 수영하는 학교, 음주와 흡연이 허용된 학교에 10년 전 자기 자녀를 보낼 한국 부모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시작했던 97년의 간디학교는 자유학교와 공교육 학교의 중간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공교육보다는 훨씬 더 많은 자유(예를 들어, 두발, 염색, 복장, 일부 수업의 선택 등의 자유)를 준 것이지만, 서머힐 식의 자유학교보다는 적은 자유를 준 것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저는 늘 스스로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는 학교에서 출발하는데 만족하였지만, 그 당시 학생들이 학습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런 권한도 없는 간디학교의 상황에 그리 만족하지 못했고, 지속적으로 학생들의 자유와 권한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학생들이 스스로 수업을 만들고 강사가 될 수 있는 권한, 교사 없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권한, 학교의 많은 부분에서 교사와 학생이 함께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학생들에게 주려는 노력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유학교다운’ 자유학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10년 간 이러한 노력을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점은, 교사나 학생이나 학부모나 모두 자유의 능력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능력의 전제 없이 자유학교는 제대로 운영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특히 교사와 학부모가 이러한 자유에 대한 굳은 신념과 자유에의 성장 없이는 자유학교는 그야말로 자유학교가 아니라 방종학교 내지 개판학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자유학교에는 그저 자기 편한 방식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아이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무기력한 아이들,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아이들이 많다.’ ‘자유학교 교사들은 그런 아이들을 호되게 꾸짖지는 못하고 문제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다.’ ‘자유학교에서 반듯하고 책임감 있게 생활하는 아이들은 교사들의 방치 가운데 늘 희생양이 되고 있다.’
간디학교에 온 교사 중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절망하고 떠난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아마도 김희동 선생님이 ‘민들레만들래’ 경험에서 깨달았듯이, ‘아, 자유교육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구나.’ ‘지나친 자유는 인간을 망치는구나.’ ‘나이에 맞지 않는 자유의 허용은 아이의 영혼을 황폐하게 하는구나.’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유의 능력을 전혀 갖지 못한 아이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면, 이기적으로 되거나 무기력하게 되거나 아니면 권리만 주장하고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청소, 시간 약속, 무단외출 않기, 기숙사에서 음주 않기, 남의 물건 손대지 않기 등 기본적인 규칙을 지키지 않아 끊임없이 전체모임에서 그런 유치한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상황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이미 유치원에서 배웠어야 한 것들이 아닌가요? 왜 이런 것들이 지켜지지 않아서 늘 모여서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것인가요? 이러한 모습이 자유교육이라면 자유교육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교육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한심함을 조장하게 하는 것은 과연 자유교육이 아이들에게 지나친 자유를 주었기 때문일까요?
사실 서머힐 교장 니일은 이런 현상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것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12, 3세가 넘어가면 자유교육은 잘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14, 5세의 나이에 서머힐에 온 아이들 중 어떤 아이들은 잘 성장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만 하다가 떠났다는 것입니다. 교육의 성과도 거의 없이 말이죠. 니일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의 갑작스런 자유교육은 실패하기 쉬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정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실패는 자유교육 그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자유와 책임을 가르치지 못했던 그 이전의 가정교육이나 초등교육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이제 선생님이 제기하신 “자유주의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해보겠습니다. 자유교육은 인간의 자연적인 발달과정을 인정하지 않고 어린 아이에게도 어른에게 해당되는 자유와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선생님이 자유교육에 관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비판입니다. 자유교육이 인간의 발달과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초등학교 아이나 고등학교 학생이나 마치 다 자란 어른인 양 높은 판단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마도 서머힐 학교에서 5~6세 아동에서부터 고등학생 연령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생활규칙을 만들고 그 규칙들을 어기는 경우에 처벌이나 처방을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자유교육의 허점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극단적인 예는 <파리대왕>의 비극입니다. 자유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모여 가장 잔인한 규칙과 비인간적인 처벌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른의 적절한 가이드와 관여가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모든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우를 간디학교나 다른 대안학교에서 경험하거나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교육은 결코 방치교육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허용하는 자유의 양이나 범위도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점점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즉 유아와 초등학생, 중등학생의 선택과 책임의 범위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유아, 초등, 중고등학교 연령의 아이들을 구분해서 교육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물론 특별한 상황에서는 연령 구분 없이 한 가족처럼 교육할 수 있다고 봅니다만, 학교 형태를 취하는 한 그리고 적어도 4~50명 이상의 학생들이 함께 교육에 참여하는 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현실화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안전과 건강에 관한 한, 아이와 청소년과 어른의 자유 범위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상 간디학교에서도 안전에 관한 한 학생들의 의결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여행을 떠나겠다거나 무단외박을 하겠다면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성장과정과 거기에 어느 정도 비례한 자유의 허용이라는 대원칙에서 저는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자유의 양과 범위일 겁니다. 선생님은 제가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자유를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연령에 따라 적절한 자유의 양과 범위가 어느 정도인가에 대해 상당히 다른 견해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18세 이전에는 거의 선택 능력이 없고 따라서 자유가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보는 과거의 입장에서부터, 그들에게도 상당한 자유가 주어져야 하고 그럴 경우에만 건강한 자유시민을 기를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분명 이러한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 있고 아마도 선생님은 저보다는 조금 신중한 입장에 서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편의상, 자유의 영역을 학습 영역과 생활 영역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물론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생활과 학습 영역에서 모두 너무 많은 자유를 아이들에게 허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먼저 생활 영역에서, 자유교육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지나친 자유를 허용한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즉 약속 지키기, 남을 고의로 해치지 않기, 자기와 다른 인간을 수용하고 관용하기,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청소 같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기 등 유치원 학생도 알만한 것들에 관해서도 아이들의 다수결 원칙에 맡기고 시간 낭비를 하거나 방종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기주의적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비판은 상황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최악의 경우는 <파리대왕>의 경우이고, 최상의 경우는 아마도 니일 교장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당시의 서머힐 학교가 아닐까 싶습니다. 서머힐의 아이들에게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주었지만 그 아이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들을 만들어냈고 그 규칙들을 어길 경우에 대한 처벌과 처방 또한 훌륭하게 만들어냈습니다. 물론 그러한 배경에는 니일을 비롯한 자유주의 신봉자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상당히 작용했겠지요.
간디학교의 아이들도, 그들에게 자유와 책임이 주어졌을 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정해놓고 있으며 더 나아가 친절과 배려, 생태주의 가치나 공동체 가치와 같이 좀더 적극적인 의미의 규칙, 예를 들어 음식 쓰레기 남기지 말기, 환경에 해를 주는 샴푸나 비누 쓰지 않기 같은 규칙도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그런 규칙들을 잘 지키느냐고요? 학생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에 대한 존중감을 상당히 갖고 있고, 규칙을 어길 경우 일종의 죄책감이나 친구들에게 대한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나 교사들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규칙을 따를 경우와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학생들의 집단에 따라 자율성의 능력이 상당히 다를 수 있으며, 규칙 만들기도 제대로 되지 않고 규칙을 지키는 아이들이 거의 없어 그야말로 개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학생집단에 기본 인성교육이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의 비율이 높거나 그런 아이들이 전체의견을 좌지우지할 경우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자유학교는 아마도 자유의 천국이 아니라 악몽의 학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유학교를 추구하는 한국의 대안학교들 중에도 이런 학교들이 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그래서 자유학교는 어떤 다른 학교보다도 성공의 확률이 낮은 것 같습니다.
학습 영역에서도 저는 아이들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금산 간디학교나 산청 간디학교의 경우, 지식교과 중 필수과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나 수학 같은 교과를 전혀 공부하지 않고도 졸업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러한 저의 입장과 선생님의 입장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러한 차이 뒤에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에 관한 철학이나 형이상학의 차이가 분명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적발달에서 어떤 보편적인 순서나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잘 이해하고 있다면, 김희동 선생님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며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인간의 지적발달에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 자연적 순서와 길이 있다는 입장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깨달음의 길에는 과학이나 학문을 통한 분석적 길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직관을 통한 통합의 길이 있다고 믿으며, 지식이나 지혜의 길에도 개인마다 상당히 다른 길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연계의 생물체인 동시에 다른 생물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이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물론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연령의 아이들에게 같은 내용의 같은 교과를 가르치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는 목수와 함께 일하면서 목수 일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배울 수 있고, 어떤 아이는 학문을 통해, 또 어떤 아이는 예술행위를 통해 인간과 자연에 관해 배울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생은 배움의 여행이며, 어떤 여행이 더 나은가에 정답은 없다고 보는 것이 저의 자유주의적 신념인 것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제가 어쩌면 발도르프 교육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수가 있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자유의 양과 범위에 관하여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 봅시다. ‘초등학교 학생에게 수업선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할 것인가?’ 지구상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은 물론이고 중학생과 고등학생조차 무엇을 배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배울 것인가에 관해 학교와 교사가 결정합니다. 하지만 소수의 자유학교들은 이러한 보편적인 관행에 맞서, 아이들에게 스스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결정하게 하고 더 나아가 수업이 아닌 여러 경로를 통하여 학습하는 것을 권장하곤 합니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아이들의 자연스런 발달과정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범위와 양에서 훨씬 더 많은 모험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저도 그런 입장에 서 있구요. 저 역시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아이의 연령에 따라 자유의 양을 다르게 허용해왔고 제가 만일 초등학교나 유치원을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다만 저는 다른 교육자보다는 더 많은 자유를 아이들에게 주려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아이들의 건강과 생명에 위험이 없는 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아이들에게 가능한 많은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입장의 자유주의 교육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교육철학인가, 혹은 자유주의 교육이 과연 대다수 아이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일 겁니다. 과거에 저는 이 물음에 대해 ‘그렇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그러했는데,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관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간은 실제 상당히 자유로운 존재이다’라는 낙관적인 인간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앞의 당위론적 생각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진정 자유로운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인간은 대체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생각은 최근에 이르러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아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어른조차도 생각만큼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다소 비관적인 인간관에 도달한 것입니다. 진정 자신의 선택을 하고 싶어 하면서도 실제로는 남의 이목이나 여론에 흔들리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그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지는 삶을 살지 못하는데 대해 변명이나 정당화를 하고 마는 것이 어쩌면 보통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온통 ‘네 자신을 믿어라’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라’ ‘긍정적으로 살아라’ 이런 책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많은 이들은, 제가 처음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자유롭지 못하며 자신의 선택을 잘하지 못하고 책임도 못 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유롭지 못한 부모 아래 자라난 아이들은 자유와 책임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고,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에게 갑작스레 많은 자유를 주는 것은 상당한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의 제 입장은 상당히 후퇴한 것이 사실입니다. 한때는 자유교육은 누구나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지금도 당위적인 관점에서는 저는 여전히 자유주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보통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의 능력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자유교육은 다수가 아닌 소수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일지도 모릅니다. 전 지구적으로 보더라도 이러한 자유교육을 선택하고 있는 부모들과 아이들은 소수입니다. 저는 더 이상 제 교육의 신념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수를 위한 교육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김희동 선생님, 이제 제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시는지요? 이런 맥락에서 선생님이 제기한 다섯 가지 구체적인 질문들에 대답해보기로 하겠습니다.(이미 앞에서 어느 정도 답변이 되었겠지만.) 선생님의 질문 중에서 앞의 네 가지 질문은 자유의 허용 범위에 관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지요?
1. 자유학교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허용되는가? 예를 들어, 흡연, 음주 같은 행위가 허용되는가?
2. 책임질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나이를 언제쯤으로 보는가? 예를 들어,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더 이상 공부하지 않고 프로게이머의 길로 나서겠다고 할 때, 중1학생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3. 자유학교에서는 지나친 자유로 말미암아 하고 싶은 것만 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아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끝까지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4. 마찬가지로, 남에게 피해주지 않은 범위 안에서 무엇이든 해도 좋다는 자유교육에 의해서 공동체성이 결여된, 철저하게 개인주의적인 ‘뺀질이’가 늘어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먼저 생활의 영역에서 보겠습니다. 원칙적으로, 간디학교에서는 생활의 영역에서, 고등학생들의 경우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즉 어떤 생활규칙을 정할지, 그리고 규칙을 어길 경우 어떻게 할지에 대해 학교가 일방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전체식구가 모인 자리(식구총회)에서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이 이러한 결정에 동등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인 흡연이나 음주에 대해서 허용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우선 학생들에게 그 결정권을 주는가라는 뜻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결과적으로 간디학교에서는 그 행위들이 허용되고 있는가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앞의 뜻이라면, 그렇다라는 대답이 나오고, 후자의 뜻이라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올 겁니다.
예를 들어, 산청 간디학교(고)에서 흡연할 경우 벌칙을 주는 규칙에 대해 그 규칙을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없앨 것인가를 전체회의에 두 번인가 붙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대다수의 학생들은 흡연행위를 처벌하는 규칙을 유지하자는 입장에 동의하였습니다. 간디학교의 학생들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폭력, 약속 안 지키기 등)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음주, 흡연)를 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더라도 해야 할 의무들(샴푸 안 쓰기 등)도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규칙들은 학생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교사와 학생이 함께 장시간의 토론을 통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비록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간디학교는, 서머힐과는 달리 가치관 교육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서머힐 식의 자유학교와 간디학교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고 봅니다. 서머힐 학교는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서 자유만 주면 모든 다른 가치가 실현된다고 보는 한편, 간디학교는 자유 외에도 건강, 사랑, 지혜 같은 다른 가치들이 있다고 보고, 가치관 교육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 교육은 아이들의 의사결정에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물론 주입식 가치관 교육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염려처럼 자유학교에는 흡연을 하고 음주를 하는 아이들이 상당수 있고, 하고 싶은 일만 하려 하는 이기적인 아이들과 공동체성이 결여된 ‘뺀질이’가 상당수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유학교에서 그런 아이들이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이 자유학교에 와서 그렇게 변한 것일까요? 제 생각은, 앞에서 밝혔듯이 이렇습니다. 자유학교에는 이기적인 아이들, 게으름뱅이들, 개인주의적인 뺀질이들, 무기력한 아이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교육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보다는 그 이전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가 강제성이 사라진 자유교육의 환경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것이 보다 공정한 견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해 이미 오랫동안 이기적인 습성에 젖은 아이들(가치관 교육의 결여나 방치교육의 결과)이거나 아니면 오랫동안 부모의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자유가 주어지자 제멋대로 방종하거나 무기력한 아이들인 것입니다.(억압교육의 결과)
이제 학습의 영역에서 보겠습니다. 초등 3학년 아이가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한다면 허용할 것인가? 저라면, 저희 집 아이가 프로게이머나 백댄서나 재즈음악가가 되겠다고 하면 반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선택을 통해 전인적인 성장이 가능한지에 관해서는 비상한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즉 우리 아이가 백댄서가 되기 위해 전인적인 성장을 포기한다면 저는 반대할 것입니다. 프로게이머나 백댄서나 재즈음악가가 되기 위해 학교를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인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서 건강을 돌보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통해 소통과 배려를 배우고, 음악이나 댄스의 집중적인 공부를 해가면서 인생과 세상 그리고 자연에 대해 배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비주류의 길을 가는 아이들에게는 더욱더 어른의 세심한 가이드와 코치가 필요하겠지요. 아마 아이들은 순간적인 판단과 선택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른에 의해 면밀주도한 지시와 안내를 받아 실수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고 실수를 하는 것이 진정한 배움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습 영역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열정을 촉발하는 것은 바로 자발성, 곧 자신의 진정한 선택과 자유인 것입니다. 따라서 학습 영역에서 저는 가능한 많은 자유를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 질문은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에 관한 형이상학적 질문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정신적 존재이나 육체라는 한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육체를 갖게 됨으로써 이러한 제약을 통해 더 높은 의식의 존재로 나아가게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저는 많은 이야기를 할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 관심도 부족하고 아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일원론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만 이야기 드립니다. 즉 육체와 정신이 늘 함께 존재하는 모습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고, 그것은 인간의 약점인 동시에 인간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들이 실제 한국의 대안교육현장에서 어떤 함축적 의미를 가지게 될까 고민해 보았고 그것들을 한번 정리해보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한 것이라 충분한 숙고가 부족했을 것이고 간디학교 교사들 간에 충분히 공유되지 않은 부분도 포함되어 있어서 다소 조심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깊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지난 10여 년의 경험과 그 경험의 분석에 따르면, 자유교육은 다수를 위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특히 어린 시절 선택과 책임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연령의 아이들에게 갑작스런 자유교육을 하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자유주의 부모의 가정에서 자유와 책임을 배우며 자라난 중고등학생들만 받거나 아니면, 자유교육의 연령은 유아나 초등학교 연령으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간디학교처럼 시골의 기숙형 학교로서는 초등 대안학교를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자유학교의 철학을 가진 도시의 초등 대안학교들과 연계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입니다.
둘째, 다수의 아이들에게는 자유교육보다는 자유 허용의 범위에서 자유교육과 공교육의 중간 정도에 서 있는 교육(예를 들어 발도르프 교육)이 더 현실적이고 보편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자유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갑자기 많은 자유를 주기보다는, 연령에 따라 점진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를 허용하는 교육이 다수의 아이들에게 보다 교육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유아 시절 가장 기본적인 인성교육이 부재하여 제멋대로가 된 이기적인 아이들이나 게임중독이 된 아이들에게 자유교육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어쩌면 이런 아이들에게는 존중과 수용의 자유교육보다 훈육과 다소 엄격함을 통해 어린 시절의 잘못된 습관들을 고쳐주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특히 책임을 배우지 못한 중고등학교 연령의 아이들에게 자유교육은 회피와 핑계와 정당화를 일삼게 함으로써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자유교육을 통해 그런 아이를 변화시키려면 스스로 깨닫고 변화하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교사의 눈물과 헌신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최근 많은 부모들은 영어 수학 같이 입시에 도움이 되는 공부만 강조하는 반면, 아이들이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가르치는 데는 소홀한 경향이 많습니다. 공중도덕 지키기, 차례 지키기, 약속 지키기, 친절, 용기, 정의 같은 기본덕목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어린 시절에 좋은 습관으로 정착되었어야 할 것들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인간교육이 부재한 결과, 중고등학교 연령에 들어갈 무렵 아이들이 제멋대로인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방치로 인해 게임중독이나 인스턴트 식품 중독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에게 자유교육은 별 효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관학교 식 교육이 나쁜 버릇을 고치는 데는 훨씬 더 효과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릅니다.
넷째, 학습에서 학생들이 상당한 자유와 선택권을 갖고 있는 자유주의 교육은, 적어도 단기적으로 볼 때, 대학입시에 상당히 불리한 결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학부모에게는 매우 부담스러운 선택이 될 것입니다. 실제 금산 간디학교의 졸업생들은 졸업 후 대학진학을 곧바로 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곧바로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3년 간 자기발견을 위해 다양한 교과, 동아리 활동, 많은 체험과 봉사를 하느라고 입시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학벌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자유주의 교육을 선택한다는 것은 철저한 자유교육 신봉자가 아니라면 상당히 위험한 도박이 될 것입니다.
다섯째, 부모의 억압으로 위축되어 있고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들에게는 자유교육이 다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이기적이기보다는 자신감이 결여된 아이들입니다. 이런 유형의 아이들은 흔히 왕따를 쉽게 당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아이들은 자유학교에 와서 자신감을 많이 회복하기도 하는데, 하지만 이런 증세가 심하여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아이는 치료가 필요하며, 이런 경우는 학교 형태가 아닌 비학교 형태의 교육이 더 맞을 것입니다.

김희동 선생님,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생산적인 시간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기회를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에 만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늘 행복하시길….


2007년 4월 1일
금산에서 양희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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