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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작성자 : plantinoid
  수정 | 삭제
입력 : 2005-05-22 23:56:57 (7년이상전),  조회 : 423
<박우현의 들살이 일기>[2005/5/19/나무/맑음]
제목: 들살이

아침햇살 차를 타고 들살이를 갔다. 민속 외암마을에도 가봤는데 재미 있었다. (특히 달님에게 장난치는게 재미있었다.) 저녁은 목삼겹살이었는데 맛있었다. 자령이와 영태가 물막기 하는 것도 봤다. 물레방아 돌이기도 했는데 재미있었다. 물레방아는 어떻게 돌아갔냐면 시계방향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은 어떻게 놀았냐면 물레방아를 멈추게 한 다음 물이 꽉 차면 움직이게 하였는데 나는 조금 우스웠다.

--재미있었으면 고맙지요! 지금 물레방아는 사라졌다. 현재의 물레방아는 생활용품이 아니라 관광용품이나 전시용품일 뿐이다. 기계라는 괴물로부터 사람을 지키겠다고 기술문명의 바벨탑을 보이콧하는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차라리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수천 년간 이어온 방법, 그러니까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가는 생활에서 멀어지게 되었는가라고 묻는 편이 낫겠다. 혹은 낫을 사용하는 방법은 거의 모르면서 리모콘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일은 어떤가? 그러면서도 리모콘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은? 우리는 그저 GE나 파나소닉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부분까지만 알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을 그들이 만드는 셈이다.”(108쪽)

==먹는 얘기 이외에 인상적인 얘기를 한 것만으로도 좋다!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값이 싼 계란으로 즐거워하기 전에 비참한 처지의 동물들을 키우는, 공장형 농장을 기억해야만 한다.”(77쪽) 공장형 학교도 기억해야 할 듯하다. “아이가 일상 속에서 겪은 모든 일에서 대단한 가르침을 찾아내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 간단한 실수를 두고 항상 아이들을 바로잡으려고 들어서도 곤란하다. 아이들에게 강의해서는 안된다.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이들은 그 순간만을 기억할 뿐이다. 아이들은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 시간 뒤의 일도 알지 못한다. 그저 기어오르고 뒹굴면서 아이들은 시간을 보내는데, 그 일이 아이들에게는 중요하다.”(229쪽) “간단하게 말하면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없는 시절부터 모든 사람들이 보냈던 전형적인 어린 시절의 추억이 요즘 아이들에게도 필요하다.”(스코트 새비지 엮음/김연수 옮김, 2001, 《플러그를 뽑은 사람들》, 나무심는 사람, 252쪽)

이 책은 큰 얘기를 할 때는 서로 모순되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예컨대 한 사람은 전지구적 사고를 긍정하고 또 한 사람은 부정한다. ①“우리 기준에 맞춰 기른 말은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습니다.”(46쪽) ②“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동네에서 직접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고 들으면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들을 배워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전지구적인 사고란 전자공학이 만들어낸 신화일 뿐이었다. 전지구적 사고는 완전한 무지보다 더 나쁜, 반토막 지식을 낳는다.”(259쪽) (물론 두 사람은 모두 “환원주의자들의 신화”(222쪽)와 “환원주의적인 정보”(223쪽)를 거부한다.)

그러나 가볍게 사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얘기할 때는 정말 명쾌하다. ⑴ “친절한 웃음과 밝은 표정의 버사는 감자 하나 당 세 개의 싹이 날 수 있도록 감자를 어떻게 세 조각으로 자르는지 보여주었다.”(168쪽) 감자씨는 묵은 감자, 칼로 썰어심는다. 이런 구체적인 노래에도 나오지 않는 더욱 구체적이고 명확한 얘기다! 산어린이집에서 “화장지는 세 칸”씩 끊어서 사용하라는 얘기--“최근에 어떤 글을 보니 아이가 네 살 때까지 배운 것이 그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배운 것보다 더 많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한다.”(218쪽) --어떤 통계를 말하는지 모르지만 흥미있는 얘기다--, 깐깐징어의 생활글 글쓰기 지침 이후 세 번째로 감동적인 설명이다.(“글을 쓸 때는 ① 눈을 감고 ②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천천히 생각하고 ③ 그 중에서 글로 쓰고 싶은 것을 하나만 정하고 ④ ‘제목’을 쓰고 ⑤ 내용을 아주 천천히 써 내려간다. ⑥ 글씨는 예쁘게 정성스럽게 쓰기. 3.21. 깐깐”) ⑵ “나는 대략 10분 정도면 자동세탁기 1대 분량의 빨래를 손으로 할 수 있다... 정말이지 간단한 일이다. 이 놀라운 과정의 가장 큰 핵심은 우선 빨랫감을 물에 푹 담가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116쪽) “대부분의 경우, 빨랫감을 충분히 물에 담가 두기만 하면 세탁비누를 사용할 일이 별로 없다.”(117쪽) “빨래에 반드시 모든 가족을 동원하라.”(121쪽)

☆ 지난번 들살이도 기억난다. 4월 31일 아침햇살댁 들살이에서 우현이는 ‘별버’그림을 그려왔다. 별버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 ‘합성동물’이다. 그림에 쓴 다일십이목(多日十二木)은 성목(星木)을 풀어쓴 것으로 별에서 태어났다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별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지은 ‘별버’의 이두식 표기인 셈이다. 별버의 몸은 티라노사우르스의 꼬리, 새의 다리, 두더지의 몸통, 검독수리의 날개, 트리케라톱스의 뿔, 여우의 입과 코로 구성되어 있다. 각 요소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딱 맞게 연결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요소를 모아 하나의 통합된 그림(gestalt)을 그려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그림은 산학교 아이들이 ‘괴물’을 주로 그린 ‘괴물시대’의 우현이 판본일 것이다. 종은이도 ‘괴물’그림을 그렸다. 우현이는 자기가 그려놓고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면 부담스러워한다. 아무튼 ‘괴물’그림은 아이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한 방식일 것이다. (요즘 산학교 교실 벽에는 그림보다는 결의사항이 많이 붙어 있는 듯하다!) 매일 꽃과 나무를 보면서도 아이들은 ‘괴물’을 더 인상적으로 느끼며 산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20일 금요일 저녁에 은행동으로 향하던 우현네 자동차 안에서)
영태엄: 고등어를 놓고 왔네. 잠깐 기다려.
수빈: 고등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우현압: 산학교가 있는 곳을 방아다리라고 한다는데 물레방아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수빈: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방아다리라고 한 것은 물레방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릇가마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산학교 근처에서 도자기 조각이 많이
보여요. (조수빈! 1학년 맞어?!)
영태엄: 도자기가 많은 건 화분을 쓰는 화원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닐까?

<방아다리에서 물레방아가 돌던 때는 행복한 시절이었을까>

산학교 주변의 전래지명과 문화를 확인하기 위해서 산학교 주변을 돌아보았다. 토박이 찾기가 참 어려웠다. 우선 쟁골윗길을 걸어서 ‘세신주유소’까지 왔다. 웃대야리 동쪽에 있는 쟁골은 산학교 북쪽 지역으로 언덕너머에서 외곽순환도로까지의 지역이다. 쟁골은 조선 말엽에 재궁(齋宮)이 있어 재궁골이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시흥군지下』1988, 1048쪽)

쟁골윗길 중간에서 (50대 후반 또는) 60대 어른을 만났다. 그 어른은 30년 동안 이 지역에 사신 분으로 쟁골에서 밭을 돌보고 있었다. 그 어른을 통하여 쟁골과 아랫대야리며 웃대야리의 위치를 대강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시대의 신사터는 잘 모르겠지만 대한주유소 길 건너 모래산 중턱에 있었다면 신천동 쪽의 수인산업도로로 올라가는 쪽이라고 하셨다. 서낭당터는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예비군 훈련장(103보병여단 48관리대대???)에 있었다면 하우고개쪽일 거라고 하셨다. 방아다리라는 이름이 유래된 ‘물레방아’의 위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하셨다. 토박이로 오래 산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데, 웃대야리 덕수아버지(81세)나 한신가든의 한양수 씨한테 알아보라고 하셨다.

내가 이것저것 물으니까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했다. 기회가 있으면 학교 아이들과 이 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알아본다고 했다. 어느 학교냐고 또 물으셨다. 방아다리에 있는 학교라고 했더니, 거기 무슨 학교가 있느냐, 신천초등학교를 말하느냐고 했다. 비인가의 작은 학교라고 설명해 드렸더니, 그런 학교도 있느냐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방아다리길을 걷다보니, 구기자나무 언덕과 민물양어장도 있었고 공장도 있었다. 개고기 도소매를 하는 ‘별난농장’ 앞에서는 동남아 아저씨를 만났다.

‘방아다리길’은 산학교 오동나무와 이웃집 느티나무 사이에서 ‘가마길’과 만난다. 산학교는 530여 그루의 쥐똥나무로 삼면이 둘러쌓여 있다. 요즘 기와와 돌로 만든 한옥 울타리는 1m에 50만원씩 든다고 한다. 이름이 그리 고급스럽지 않은 쥐똥나무 울타리든 좀 각박한 탱자나무 울타리든 생울타리는 아마 울타리 중에서 가장 저렴한 울타리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는 종종 가시돋친 탱자나무 울타리를 보곤 했는데 요즘에는 탱자나무 울타리보다는 쥐똥나무 무더기가 좀더 많이 눈에 띄는 듯하다.

줄지어 선 쥐똥나무들을 보며, 지금은 흔적만 남은 옛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생각해 본다. 물레방아와 옹기가마, 솟대와 장승, 풍물과 쥐불놀이가 있던 시절은 대골에서 이름으로 흔적만 남았다. 불과 100년도 안되는 시간인데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구성하던 풍경들이 이제는 거의 어떤 물증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대골’이라고도 불리던 대야리(大也里)에는 방아다리, 아래대야리, 웃대야리(웃대골), 쟁골, 여우고개, 하우고개 등의 자연취락이 있는데, 토박이가 적은 현재는 별 의미가 있는 이름들인 것 같다. 대골은 또한 병풍바위의 마애보살입상, 서낭당터, 왜정때의 신사터, 인천부의 우사단터(雩祀壇址), 소래산의 절터 등이 있어 산천의 정기가 모인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발의 기대가 꿈틀대고 땅값만 오르고 있을 뿐 영성을 가다듬던 옛 추억은 지금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대야동 장대용씨댁 대문밖 축대 위에는 약 300년 묵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둘레는 약 3m이고 높이는 15m이다. 지금은 휴식공간은커녕 동네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대야동에서 나는 역사의 단절과 변화의 무정함을 보았다. 대야동에서 역사의 흔적들은 무의미한 것으로 방치되었고 옛 전통문화는 잊혀진 것이 되었다. 주민들의 반응으로 보아, 지역사회에는 별다른 자랑거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자리에 들어선 산학교는 우선 지역사회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의 진리가 멀리 있는가. 바로 발아래 있고 일상생활에 있다는 것이 산학교의 정신의 하나가 아니던가. 옛삶이든 현재의 삶이든 ‘두텁게 읽은 삶은 최고의 교육자원’이라는 명제가 산학교의 교육방법론이다. 물론 바쁜 사람들이 삶을 두텁게 읽는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선녀와 신선들이 모여 삶을 두텁게 읽기 위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두 아이를 책임지기로 한 나는 딱 10분 정도 홍보에 대한 논의를 들었다.

○○압: 주변 사람들이 공감 못하겠다고 해요. ○○한다면 모를까...
○○압: 소식지나 브로셔라도 있어야 얘기를 꺼내겠다. ⑴ ○○ 이름도 부천이 들어가지 않아서 홍보하기 어렵다.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입이 너무 아프다. 얘기를 꺼내도 귀족교육을 시키자는 거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할 내용이 없다. 우리의 무기를 갈고 닦자.
○○압: 두명씩 ○○와라 하는 식의 구체적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압: 장점과 콘텐츠를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략도 중요하다. 앞으로 2년이 중요하다. 한 ○○에 10명씩이면 60명의 ○○들에게 얼마의 공간과 교육비가 필요한가.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큰그림, 장기계획이 명확하지 않으면 당장 가을에 ○○○을 ○는 것부터 문제가 된다. 그림을 그려보는 게 시급하다.
○○압: ⑵사람들이 ○○학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80%이상 몰랐다. 이미지홍보에는 대중화시켜서 오픈하는 게 유리하다.
○○엄: 아이가 피곤해서 저녁도 못 먹었어요. 둘 중에 하나는 집에 가야해요.
=음... ㉦학교의 창세기는 아직도 계속 쓰여지고 있구나!

들은 게 이것 뿐이니 뭔가 내 생각을 가다듬자고 하면 거기서 받은 ‘계시’를 음미할 수밖에 없다. ⑴다른 건 몰라도 ‘산학교’이름이 홍보하기에 불편하다는 얘기를 듣고 참 재미있는 문제제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흔하디 흔한 것이 산인데, 산학교에서 얘기하는 산은 무엇인가? 여기서 모호해지면 상당히 많은 것들이 모호해진다. 이런 생각을 별로 해보진 않았으나 참 의미있는 지적인 것 같다.

다들 ‘산’의 의미는 다를 것이다. 그 다른 것들이 만들어 내는 ‘전체그림’(gestalt)는 또다른 차원의 내용이 있을 것이다. 또한 프랙탈구조처럼 부분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속에 부분이 있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산학교는 가족적인 규모를 유지하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산’교육은 ‘참’교육을 포함한 ‘대안’교육이니, 거창하지는 않아도 야무진 교육인 셈이다. 그걸 좀 시적으로 표현하자면, 산학교는 ‘산'의 '계시(message)'를 받아 세워지고 돌아가는 학교다. (‘계시’는 ‘규약’으로 승화된다. 아이들이 욕말을 많이 쓰는 것도 하나의 ‘계시’다. 그 ‘계시’를 올바로 해석함으로써 산의 계시는 생활의 리듬으로 체화될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산에서 배움집을 보고 배움집에서 산을 볼 수 있는 교육구조를 가진 곳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신적인 귀족교육인지 몰라도 실제로 귀족교육인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고비용저효율의 ‘귀족흉내교육’은 아니다. 실제 교육내용을 보면, ‘흉내교육’을 거부한다고 했다고 해서 좋은 모범을 무조건 배격하는 게 아니라 산학교의 현실에 맞는 것은 또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산학교의 운행법칙은 공명 또는 메아리의 법칙?)

도시 근교의 ‘산’은 도시의 허파다. 산은 이런 생태적 가치 이외에도 사람들의 시야를 넓혀주는 교육적 가치가 있다. 나는 ‘산’을 생각할 때에는 종종 <우리 집 그림>이란 동시와 <보았니? 아이들아>라는 시를 생각한다.

“동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며/ 멋지게 그림 한 장 그리렵니다.// 어디를 골라서는 그려 볼까나/ 우리 집 있는 곳을 그리렵니다.// 밭마당에 매여서 여물 먹는 소/ 삽작에 웃고 섰는 누나와 아기.// 하나도 안 빼놓고 또박또박/ 우리 집 그림 한 장 그리렵니다.//”(‘우리 집 그림’ 전문) (권태응, 1995, 『감자꽃』(주)창비, 57쪽)

아이들은 낮에 올라가서 집그림을 그렸다. 다음 시를 보면, 그 아이들과 보호자는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그냥 내려오지 않았다. 김용택 님의 시에 “보았니 아이들아! 산아래 마을에 오래오래 꺼지지 않는 불빛들을 보았니?”라는 시구가 있다. 밤까지 머물러 마치 하늘의 별빛을 보듯이 산아래 마을에서 빛나는 불빛들을 보았다. 김용택 님의 시에서 시점이 반드시 산꼭대기라고 확신하긴 힘들지만, 그 시점은 적어도 마을의 불빛을 볼 수 있는 마을밖의 어떤 지점일 것이다. ‘산’은 마을과 도시의 외부자가 아니라 동반자다. 위로 솟고 옆으로 퍼진 산은 크고 작은 꿈이 있음과 현실에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⑵ 홍보 얘기를 들으며 『새벽의 건설자들』이란 책을 떠올려 보았다. 이 책은 생태공동체를 건설하는 경우의 이상과 현실의 ‘균형’ 등 ‘균형’을 특별히 강조하는 책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새로운 일의 시작은커녕 일상생활의 안정, 현상유지도 그리 쉬운 건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새벽의 건설자들』에서는 교육은 ‘우리가 삶을 사는 방식’(381쪽)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책은 홍보와 관련해서는 주류 언론을 무시해도 안 되지만 연연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20년 이상 아메리카에 있는 수백 개의 공동체들을 연구한 사회학자 벤저민 자블로키에 따르면, 그들의 급진적인 프로그램이 완화되고 충격적인 행위들이 잦아들자 언론 매체의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생활양식으로서의 공동체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졌다는 인상이 널리 퍼졌다. 그런데 전국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결과, 우리는 1960년대만큼이나 많은 공동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연구가 저드슨 제롬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것은 공동체 운동이 좀더 실제적이고 적극적으로 실천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하게 되면서, 좀더 진지해지고 성숙해지는 바로 그 시점에 대중의 관심이 시들해졌다는 점이다.’”(코린 맥러플린+고든 데이비드슨/황대권 책임번역, 2005『새벽의 건설자들』한겨레신문사, 52-53쪽)

사람들은 황당한 것에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 프로비던스 선원의 숭산 스님도 꽤 유명하구나 하는 생각, 르네상스 공동체에서는 아직도 “에너지 생산을 위한 물레방아”(93쪽)를 사용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홍보와 관련해서는 또 한가지 얘기가 참고된다. “지나친 명성은 공동체들이 그들의 역량을 수행하는 데 자주 제약이 된다. 반면에 적당하고 호의적인 명성은 사람들에게 일상의 삶에서 좀처럼 마주치기 어려운 정보를 제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481쪽) 산학교의 경우에도 “적당하고 호의적인 명성”이 필요할 듯하다.

내친 김에 생태공동체에 대한 몇가지 얘기에 주목해 본다. “공동체는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 안에서의 삶이 늘 즐겁고 편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언제나 악전고투이다.”(112쪽) “기존의 사회를 비판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훨씬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81쪽) “일반적으로 처음 몇 해에는 모든 에너지를 소득 창출, 건물, 농경지 같은 물질적 차원의 생존 문제에 쏟아 부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문화와 예술 같은 것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424쪽) “도시의 생활공동체에서는 청소를 두고 가장 많이 다툰다.”(140쪽)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자동차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말하기도 끔찍하다! ... 이제 그만 떠나라고? 농담이겠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아직 반도 말하지 못했다.”(140쪽)

“사람들과 관계 맺기에는 무한한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는 최후의 시험이다.”(469쪽) 1980년대의 공동체들은 “‘지상에서 가볍게 살기’와 ‘소비 줄이기’를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지만, 60년대와는 달리 가난의 덕을 그렇게 완고하게 격찬하지는 않는다.”(60쪽)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새 공동체들은 60년대의 경우처럼 거부된 것들을 중심으로 세워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과 상식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들을 중심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61쪽) “공동체의 진정한 강점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접근 방식을 통합하여 이상의 안내를 따르되 상식을 무시한 이상의 지배를 받지 않는 '현실적인 이상‘을 만드는 데 있다.”(130쪽) “공동체운동은 확실히 미래에 대한 고상한 비전과 영감에 그 ‘날개’를 달고 있는 한편, 과거의 풍부한 경험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146쪽)

“1800년대와 1980년대 공동체의 유사성... 당시나 지금이나 공동체의 목표는 평등과 비폭력, 협동을 기반으로 하는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150쪽) “히피들.. 그들 세대는 TV를 보고 자란 최초의 세대였다. 모든 역사적 시기의 이미지들을 보았던 그들에게 선택할 이미지들은 많았다. 그중 다수가 TV에 나온 개척민들과 인디언 시나리오를 가장 좋아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직접 그런 시나리오를 만들지 못할 것도 없었다.”(166쪽)

“1800년대 공동체와 달리, 현대의 거의 모든 공동체는 게슈탈트 요법 또는 정신 종합psychosynthesis 같은 심리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심리적인 장치가 공동체 성공의 주요한 이유로 보인다.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공동체 건설의 주요한 과업이기 때문에 이런 심리적 배려는 필수적이다.”(152쪽) “일단 사람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칼 융의 용어로 ‘그림자’--을 해소하기 시작하면 남들과 어울리고 함께 지내기가 훨씬 더 쉬워진다. 오늘날의 공동체는 구성원들이 인격 발달 프로그램을 적용하기 때문에 60년대처럼 한두 달만에 와해되지 않는다.”(174쪽)

“무언의 비판이야말로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힘이다. 우리 의사소통의 대부분은 말이 없이 이루어지지만 사람들은 비판의 낌새를 감지한다. 이러한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어 해결해야 한다.”(435쪽) 또 “끝없는 감정싸움”(435쪽)도 공동체의 힘을 소진시킨다.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훌륭한 균형감각‘이다... '비전이 없으면 죽는다.’ 그러나 현실을 모르면 역시 죽을 수 있다!”(474쪽) “알파 공동체는 ‘머리는 구름 속에 두고 두 발은 단단하게 땅을 딛는’ 정신으로 환상적인 실용주의를 펼쳐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197쪽)

“긍정적인 사고는 공동체를 시작하고 유지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공동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여러 경로를 살펴보고 또 공동체나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비판하기는 쉽다. 그보다는 낙천주의적 관점과 공동체가 이룬 최선의 것, 공동체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최상의 잠재력을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는 만든다. 생각은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현실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통해 우리 자신이 창조하는 것이다.”(457쪽)

이 책은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인지 미국의 꿈을 내세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빚이 없고 유지비가 적게 드는 좋은 집, 조용하고 안전한 이웃, 맑은 공기 그리고 나무와 꽃들. 안전에 대한 믿음과 제자리에 정착했다는 느낌. 풍부하고 건강한 양질의 식품과 안전한 음료수. 당신의 아이가 함께 놀 수 있는 많은 동네 아이들. 가까운 곳에 있는 좋은 학교. 언제든지 산책할 수 있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근린 공원. 수영할 수 있는 풀장이나 연못. 가족을 부양하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환경. 의미 있고 성취적인 일.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직장. 창조와 표현의 자유. 적당한 가격의 좋은 의료 서비스. 주일 예배를 위한 좋은 교회. 근린 위락 시설. 믿기 힘들겠지만, 아메리칸 드림은 공동체들 안에 살고 있고 실재한다!”(493쪽)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세계에 살고/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의 세계에 산다./ 당신이 만나는 사람은 모두 당신의 거울이다.”(30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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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돌 ( 2005-05-23 06:31:48 (7년이상전)) 댓글쓰기
흠..."산학교 창세기는 아직도 계속쓰여지고 있구나". 그렇네요. ....누군가의 말이 생각나네요. 공동체란 "공동의 기억을 복원하고, 공동의 경험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우현이 아빠의 작업은 주변지역을 포함한 산학교 공동체의 기억을 복원하는데, 그리고 산학교 공동체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안내서가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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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일기(6월2일) [1] bys6701채송화 2005-06-02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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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일기(6월1일) bys6701채송화 2005-06-01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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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일기(5월 31일) bys6701채송화 2005-05-31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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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수업참여기 [6] 꽁돌 2005-05-31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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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이의 인라인스케이트 [2] 노루귀 2005-06-01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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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침햇살 2005-06-01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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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일기(5월 30일) bys6701채송화 2005-05-30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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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일기(5월 26일) bys6701채송화 2005-05-26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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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일기(5월 24일) bys6701채송화 2005-05-24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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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후 일기(5월 23일) bys6701채송화 2005-05-23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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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학년 들살이 따라가기 [4] ohj5055 2005-05-22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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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아 [1] plantinoid 2005-05-22 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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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이에게 보내는 엄마의 편지 ohj5055 2005-05-22 365